송태규 시인·교육학박사
이제야 제법 겨울답다.
문고리에 손가락 쩍쩍 달라붙지는 않아도, 실내에 들어서면 뿌옇게 김 서린 안경알에 사람 구분하기가 쉽지 않으니 말이다.
잎을 놓아버린 거무스름한 나무는 무심하게 자리를 지키고 있다.
어둠 속에서 새봄을 기다리며 꾸준히 물길을 따라 뿌리 내리고 있겠다.
2024년 어지간한 대회는 끝났다.
한 해 동안 열심히 달린 마라토너들도 충전하는 시간이다.
그렇다고 마구 겨울잠만 자서는 진정한 마라토너라 할 수 없다.
땅속에 박은 나무의 심지처럼 각자 계획대로 부단히 몸을 달구어야 알찬 결실을 거둔다.
운동으로 먹고사는 선수들도 겨울철 게으름 부리면 봄부터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한다.
직장에서 나온 지 어느덧 3년이 넘었다.
직장을 그만둘 무렵 꼭 이루고 싶은 서너 가지 계획을 세웠다.
사람들은 그걸 버킷리스트라고 부른다.
나는 꿈을 이룰 수 있는 ‘드림 리스트’라 한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몽골 고비사막 마라톤 완주’였다.
꿈은 야무졌지만 사실 혼자 준비하고 짐을 꾸린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다짐은 ‘언젠가는’으로 퇴색하고 점점 모닥불이 사그라지며 이런저런 핑계만 궁리했다.
간절하면 이루어진다고 했던가. 불꽃이 식어갈 무렵 우연히 귀인을 만났다.
울트라마라톤의 큰 별 박복진 회장님이었다.
그는 몽골, 핀란드 등 외국에 대회를 만들어 직접 운영하는 유일한 대한민국 사람이다.
그가 추진하는 몽골 마라톤 소식을 듣고 얼른 차표를 끊었다.
2025년에 열릴 몽골 고비사막 울트라마라톤 사전모임에 갔다.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어떤 사람이 ‘세상은 넓고, 할 일은 많다’라고 했다.
그날 난 딱 그런 자리 그런 사람들 틈바구니에 있었다.
사람 구분하기 쉽지 않게 어딜 보나 지극히 정상으로 보이는 평범한 이웃 같은 20명 남짓이 모였다.
70을 훌쩍 넘긴 청장년부터 20대 초반 청소년까지 그야말로 남녀노소였다.
몇몇은 서로 구면인 듯 눈인사를 나누고 처음 만나는 우리는 최대한 간결하고 명쾌하게 자기소개를 했다.
사막 마라톤 완주 여러 차례, 강화도에서 경포대까지 횡단 308km, 태종대에서 임진각까지 537km, 해남 땅끝에서 고성통일전망대까지 622km를 완주한 울트라마라톤 그랜드 슬래머 여럿, 풀코스 마라톤 1,000회에 울트라 100회 완주자 등 기억조차 힘든 괴물들이 우글거렸다.
자리 구석을 차지한 나만 게을러터진 비정상이고 질소로 과대 포장한 한 봉지 과자였다.
사람들은 내게 묻는다.
어떤 대회가 가장 기억에 남는지. 참 답하기 까다로운 질문이다.
모든 대회마다 보고 느끼는 감정이 다르기 때문이다.
장대비를 뚫고 완주한 철인 3종, 밤을 꼴딱 새우고 홀로 달리며 깊이 사색에 잠겼던 울트라마라톤, 자전거에서 굴러떨어져 정강이에서 피 흘리며 기어코 완주한 대회 등 어느 것 하나 빼놓으면 다른 게 서운하다고 눈 흘길 일이다.
삶은 끊임없는 도전이다. 힘들다고 놓으면 거기가 벼랑이다.
몸뚱이라는 기계는 시곗바늘이 돌아갈수록 녹슬게 마련이다.
내 몸을 태우는 달리기를 통해 매번 새로운 것을 배우고 또 다른 자극을 받는다.
그런 과정을 통해 지난날의 내가 누구였는지 어렴풋이나마 돌아볼 수 있다.
언제까지 달릴 수 있을지 나도 내 모습이 견딜 수 없이 궁금하다.
자리를 마치면서 다시 한번 마음을 챙겼다.
이번 겨울이 나에겐 새로운 이정표를 세우고 부활하는 시간이 될 것이라고. 인생은 단 한 번밖에 없는 마라톤이다.
하고 싶은 걸 미루기만 한다면 나는 끝내 ‘언젠가는’으로 마무리하고 말 것이다.
그날 새삼 깨달았다.
‘정글은 깊고, 맹수는 많다.’ <저작권자 ⓒ 전북금강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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