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호에서는 오성칠정론(五性七情論)의 배경에 대해 언급했었다.
이번 호에서는 왜 경와 선생이 오성(五性)을 중요시하는가에 대해 자세히 논해본다.
경와 선생은 심(心)을 명덕(明德)과 리(理)와 성(性)을 하나로 보고 있다.
결과론적으로 보면 마음이 모든 작용을 하는 것이고 이 마음을 떠나서는 이뤄지는 것이 없다.
불교 화엄경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와도 일맥 상통한다고 할 수 있다.
유교의 신유학(新儒學)이 주자(朱子)에 의해 재 탄생한 것도 이 마음(心)을 어떻게 보는가가 신유학의 핵심이기도 하다.
공자는 인(仁)을 강조했었다. 인은 곧 심(心)과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흔히 하는 말 중에 하나가 ‘인심은 천심’이라고도 한다.
쉽게 말하고 있지만 이 속에 진리가 다 함축되어 있다.
인(仁)은 곧 천(天)이고 天은 곧 人이기 때문이다.
우주론적으로 보면 人은 天이다.
맹자의 핵심도 심(心)이다.
맹자는 인의(仁義)를 중요시했다.
이 모든 것이 마음에 따라서 천리만리로 변화되는 것이다.
경와 선생이 강조하는 오성(五性)도 곧 마음(心)에 있다.
이 마음을 바로잡고 지선(至善)에 이르러 이 지선을 간직하고 살자고 하는 것이 인생의 최종 목표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와 선생은 “사람의 본성이 선함은 본래 요순과 더불어 다 한가지로 마음[方寸] 안에 갖추어져 있다. 공부하는 사람은 장차 이 본성이 선함을 배워 다하고자 할 뿐이다(人之性善, 本與堯舜, 皆同而具乎方寸之內. 讀書者, 將以學此性善而欲盡之而已矣)”라고 말한다.
하늘에서 받은 이 본성은 곧 마음이다.
인간에게는 순수한 본성이 있다.
우리는 이 순수한 본성을 천연지성(天然之性)이라고도 한다.
맹자의 순수한 본성이 성선(性善)이기도 한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 본성이 순수하다는 것을 모르고 살기 때문에 인간에게 가지고 있는 깨끗한 본성을 지킬 줄도 모르고 지키려 하지도 않는다.
이유는 욕심이 물들어 가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인들은 이 본성을 간직하기 위해 공부를 강조한 것이다.
이 배움으로 인하여 도(道)를 알게 된다. 그래서 학문에 뜻을 세우고 도(道)에 나아가야 한다.
경와 선생은 “도를 배운 자는 먼저 예법으로써 검약하여 자신이 하는 일상에서 행하는 일, 의복과 음식과 남녀의 거실 같은 부류에 그 인욕의 사사로움을 깎아내고 그 천리(天理)의 공평함을 보존하면 온갖 몸[百體]이 천명(天命)을 듣지 않음이 없음을 마음으로 알고 행동거지와 말소리, 위의(威儀)와 동작이 모두 바른 도를 이어받아 따른다(立志而學道者, 先以禮法檢約, 自身於日用行事, 如衣服飮食男女居室之類, 剝其人慾之私, 而存其天理之公, 則心知百體, 無不聽命, 而容止辭令 威儀動作, 皆由順正矣)”고 말했다.
생각해 보면 우리가 일상에서 모두 일어나는 것들이다.
道는 우리 일상 속에 다 있는데 지켜지지 않을 따름이다.
밥 먹는 예절부터 해서 옷 입는 예절, 말하고 듣고 행동하는 것 모두가 道 아님이 없다.
그 道를 배워나가는 사람은 예법으로써 검약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함부로 말하고 함부로 행동하고 한다면 하늘의 이치인 천리(天理)를 지켜 나갈 수 없어 道와는 천리(千里)로 멀어진다는 것이다.
마치 『大學』에서 말하는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와 같은 이치이기도 하다.
마음을 바르게 하기 위해 수신(修身)으로부터 해야 하기 때문이다.
수신을 하다 보면 명덕(明德)이 이루어진다.
명덕이 이루어진다는 것은 마음이 바르게 된다는 것이다.
마음이 바르게 되면 인간의 순수이성(純粹理性)인 천리(天理)를 보게 되는 것이다.
이 천리를 보면 깨달음(見性)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 불교의 깨달음은 유교의 지선(至善)과 같은 것이다.
사람들이 알지 못해서 그러할 뿐이다.
심오함은 불교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유교에도 있다.
그것이 명명덕(明明德)이고 지선(至善)인 것이다.
이 모든 것이 마음을 떠나서는 아무것도 없다.
불교의 선(禪)에서 말하는 심즉리(心卽理)와 같기 때문이다.
선(禪)의 핵심은 깨달음인데 깨닫기 위해서는 인간 본래 마음을 알아야 하기 때문이다.
이 마음을 알기 위해 정진하고 또 정진하는 것이다.
이 마음을 어느 순간 알아차리게 되면 확철대오(廓徹大悟)를 하여 견성성불(見性成佛)했다고 한다.
견성성불(見性成佛)은 부처님의 경지와 똑같은 것이다.
부처님의 경지에 가지도 못했으면서 견성성불했다고 하는 것은 하늘을 속이고 제 자신을 속이는 것이다.
견성성불을 하게 되면 육신통(六神通)을 통해 버려서 부처님과 같이 우주 삼라만상(參羅萬像)을 다 볼 수 있다고 한다.
육신통(六神通)은 신족통(神足通), 천안통(天眼通), 천이통(天耳通), 타심통(他心通), 숙명통(宿命通), 누진통(漏盡通)을 말한다.
신족통(神足通)은 마음대로 갈 수 있고 변할 수 있는 능력이다.
천안통(天眼通)은 모든 것을 막힘없이 꿰뚫어 환히 볼 수 있는 능력이다.
천이통(天耳通)은 모든 소리를 마음대로 들을 수 있는 능력이다.
타심통(他心通)은 남의 마음속을 아는 능력이다.
숙명통(宿命通)은 나와 남의 전생을 아는 능력이다.
누진통(漏盡通)은 번뇌를 모두 끊어 내세에 미혹한 생존을 받지 않음을 아는 능력이다.
수행을 통해 여섯 가지 관문을 뚫어야 하는데 아직 부처님 이후로 이 여섯 관문을 뚫었다는 사람은 들어보지 못했다.
이 관문을 뚫지도 못했으면서 깨달았다고 하는 것은 부처님을 속이고 하늘을 속이는 것과 같다.
부처님이 어느 제자가 깨달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냐고 묻자. 부처님이 말하기를 “육신통을 통해야 成佛을 할 수 있다”고 했다.
성불(性佛)을 하게 되면 우리가 존경하는 부처, 공자, 예수와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반문할 수 있다.
공자님이 육신통을 통했느냐고? 육신통에 마지막 관문이 누진통(漏盡通)이다.
공자님이 육신통을 통했다는 근거는 진시황(秦始皇)이 분서갱유(焚書坑儒)를 단행했다.
분서갱유는 진시황이 당시에 똑똑한 유학자들을 죽이고 유교 경서를 불태운 사건이다.
진시황이 통치를 쉽게하기 위해 야욕을 부린 사건이다.
경서란 경서는 모조리 불태워 사라질 뻔한 것을 공자가 몇 백년 이후에 이런 일이 발생 할 거란 것을 미리 알고 벽장 속에 유교경서를 숨겨 놓았다.
공자가 누진통이 통하지 않았다면 알 수 없는 일이다. /글=김진성 대기자 dong3680@daum.net
<다음 이야기는 12월 30일자에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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