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역사인물의 출생지 논란과 지역 간 갈등

온라인편집팀 | 기사입력 2024/10/31 [18:11]
김재영 정읍역사문화연구소 이사장

[칼럼] 역사인물의 출생지 논란과 지역 간 갈등

김재영 정읍역사문화연구소 이사장

온라인편집팀 | 입력 : 2024/10/31 [18:11]

전봉준(1855-1895)의 태생지를 두고 장기간 논란이 있었다.

 

그간 출생지로 첨예하게 논쟁되었던 곳이 오지영의 『동학사』에 기초한 이기화의 고창읍 죽림리 ‘당촌마을설’과 「전봉준 공초(供招)」에 기초를 둔 고 최현식의 산외면 동곡리 ‘지금실설’이었다. 

 

최근에는 고창 ‘당촌태생설’로 굳어졌다.

 

당촌마을은 천안 전씨들이 대대로 살던 집성촌이었다.

 

전봉준이 태어날 무렵 이 마을에는 전씨들이 20여 호 살았다고 전해진다.

 

전봉준은 생활이 어려워 한 곳에 오랫동안 정착하여 살 수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전봉준의 이와 같은 유랑생활은 가혹한 수탈에 시달리는 민중의 실상을 자세히 살필 수 있는 기회이기도 했으며, 결과적으로 훗날의 동지를 모으는 여행이기도 했을 것이라는 것이 설득력 있는 분석이다.

 

일본 지바대학 조경달 교수의 지적처럼 출생지에 따른 논란이 있을 수 있으나 모두 전봉준과 인연이 있는 곳임을 아는 것이 더 중요하다. 누군들 모든 인연이 소중한 것이 아니겠는가.

 

논개(論介, 1574-1593)는 장수군 임내면 주촌(朱村) 마을에서 태어났다.

 

고향이 장수이지만 진주에서 왜장을 끌어안고 죽은 것이 사실인지부터 시작해서 가락지 열 개를 과연 손가락에 끼울 수 있었는가.

 

그간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믿었던 양갓집 규수의 신분이 사실은 관기였다는 주장까지 크고 작은 논란이 계속되고 있다. 

 

논개는 진주시의 캐릭터로 이용되고 있는 역사상 인물이다.

 

그러다보니 장수와 진주 두 곳에서 기념사업을 벌이면서 연고권을 주장하고 있다.

 

대중적으로 많이 알려진 역사 속 인물들이 지역의 문화콘텐츠로 부각되면서 빚어진 논쟁이다.

 

논개는 처음 관기에서 경상우병사 최경회의 첩으로, 나중에는 양갓집의 딸로 신분이 세탁되는 등 필요에 따라 논개가 끊임없이 소환되고 있다.

 

논개는 특이한 사주를 갖고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1574년 9월 3일 밤은 갑술년-갑술월-갑술일-갑술시의 4갑술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아버지 달문은 갑술의 ‘술(戌)’이 개인만큼 개띠에 해당하는 아이를 낳았다는 지역방언 ‘개를 놓다’는 뜻의 ‘놓은 개’라 이름하고, 이를 이두식으로 논개(論介)라 하였다. 

 

헌데 논개는 원래 노운개(魯雲介), 노은개(魯隱介)로 주씨가 아닌 ‘노씨’였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개(介)’는 주로 천한 사람들의 이름에 붙는 것이기에 논개는 천민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심지어 일본인 이름 끝에 주로 ‘개(介)’가 붙기 때문에 일본인이었을 것이라는 황당한 주장도 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왜장 게야무라 로구스케의 애인이었다는 설까지 그 주장과 설이 끝이 없을 정도다.

 

스토리텔링이란 말을 잘못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후기 8대 명창이자 판소리 서편제(창시자의 호를 따서 ‘강산제’로 부르기도 한다)의 창시자인 박유전(朴裕全, 1835-1904)은 순창군 서마리에서 태어나 열여덟 살 경에 전남 보성 강산리로 이주하였다. 

 

이를 두고 순창이니 보성이니 연고지로 말이 많다.

 

박유전은 한쪽 눈을 보지 못했던 장애가 있었으면서도 이를 극복하고 어전 명창까지 된 입지전적(立志傳的) 인물이다.

 

그는 「적벽가」를 잘했고, 그 중에서도 「새타령」은 그의 장기였다. 

 

이로 인해 그는 대원군의 총애를 받아 무과급제까지 하였다.

 

1988년 6월 21일 보성공원에 그의 노래비가 세워졌다.

 

그의 창법은 머슴 출신인 문도 이날치(李捺致)에게 이어졌다.

 

이날치 역시 출생지와 성장지가 다르다.

 

그는 담양에서 살다가 만년에 장성으로 이거하였다.

 

그의 노래비가 박유전과 다르게 출생지인 담양에 세워져 있다.

 

이밖에도 전설 속의 인물로 알려졌던 홍길동(洪吉童)이 실존인물이니 아니니, 그의 고향이 장성이니 강릉이니 논란은 여전하다. 

 

장성에서는 일찍부터 홍길동 테마파크를 조성하고, 홍길동 축제를 이어가고 있다.

 

장성주조에서는 쌀로 만든 홍길동막걸리를 만들어 판매하는 등 일찌감치 콘텐츠를 선점하고 있다.

 

하지만 출생지를 따지는 건 다 부질없는 짓이다.

 

실학의 선구자인 반계 유형원(柳馨遠, 1622-1673)이 어디 부안사람이던가.

 

서울 사람이다. 태생지가 어디든 그것이 왜 중요한 문제가 되는가.

 

이순신(李舜臣, 1545-1598) 장군이 조선시대 정읍현감을 지냈지만 서울 건천동 출생이고, 을사늑약 이후 무성서원에서 호남 최초 의병을 일으킨 면암 최익현(崔益鉉, 1833-1906)은 경기도 광주출생이다.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했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겠는가.

 

이 간단한 이치를 뒤로 하고 자꾸 출생지 문제를 들먹여 쓸데없는 논란을 부추겨서는 안 될 일이다.

 

순창에 가면 전봉준 피체지가 있다. 

 

전봉준을 밀고한 자가 어느 지역 출신이냐를 놓고 한동안 지자체간 설전을 벌인 일이 있었다.

 

갈등이 깊어지다 보니 전봉준 장군이 붙잡혔다는 피체지(被逮地)에 세워진 비석이 훼손돼 경찰이 수사에 나서는 상황에까지 이르렀다. 

 

그렇다면 김경천의 고향은 어디일까. 순창군은 “김경천의 고향이 정읍 덕천면이라는 내용이 『정읍군지』와 『갑오동학혁명사』, 『동학농민전쟁 연구 자료집』 등 검증된 연구서적에 기록되어 있다.”며 정읍 출신임을 강조하고 있다.

 

한때 전봉준의 부하였던 그가 현상금에 눈이 멀어 전봉준을 밀고한 것인데 왜 순창군이 그런 오해를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일종의 불만표출이었다. 

 

김경천은 이웃 마을에 사는 선비 한신현에게 전봉준의 거처를 알려줬고, 이에 낌새를 알아차린 전봉준이 담장을 넘다 관군의 총 개머리판에 맞아 체포됐다고 전해진다. 

 

오해를 받을만한 순창군의 불편한 입장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그 부분을 유난히 부각시켜 지역 간 갈등을 일으킬 필요가 있었는지는 다시 생각해 볼 일이다.

 

우리 역사에서 이러한 유사한 사례를 찾는다면 비단 이뿐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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