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영 정읍역사문화연구소 이사장
지명연구는 전문영역에 속하는 학문이다. 그런데도 단순지명에 함몰되어 자의적인 해석과 억측에 불과한 이야기를 공공연한 석상에서 주장하고 있는 현실이 매우 우려스럽다.
지명을 깊이 있게 공부하다보면 지명이 역사학의 보조학문이 아닌 엄연한 하나의 학문영역임을 깨닫게 된다.
지명(땅이름) 연구의 필요성과 연구방법
지명은 조상 대대로 내려 온 값진 문화유산의 내력을 포함하고 있고, 한국어의 어원과 국어의 역사를 연구하는데 귀중한 자료가 될 뿐만 아니라 한국의 역사, 역사지리, 민속, 전설, 종교 등 문화사를 연구하는 데 또한 필수적인 자료가 된다.
지명은 그것을 표기할 문자의 창제가 너무 늦었기 때문에 비록 기록 시기는 뒤질지라도 발생 시기는 우리 역사가 시작되는 단계부터였을 것이다.
지명의 기원과 변천, 발생 등을 분석하려면 언어학적인 접근방법이 절실히 요구된다.
따라서 학계에서는 국어음운론의 지식을 갖고 있으면서 한국사에 폭넓은 지식이 있는 ‘국어사학자’가 연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가볍게 접근할 연구대상은 아니라는 이야기다. 그런데도 지명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구전에만 의존하는 경우가 많아 우려스러울 정도다.
지명의 경우, 구전이 기록될만한 가치가 없는 것은 아니나 그렇다고 전적으로 구전에만 의존해서는 학문적인 성과를 이루기 어렵다.
네 차례에 걸친 지명 변경과 일제의 행정구역 개편
마을유래나 왜색지명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우리 역사에서 네 번에 걸친 지명변경이 있었다는 사실을 우선 알아야 한다.
첫 번째는 757년 신라 경덕왕(景德王) 때 순수 우리말 지명이 한자로 바뀌었고, 두 번째는 1392년 조선이 건국되면서 고려시대 귀족들이 살던 곳의 지명이 바뀌었다.
세 번째는 1914년 일제의 대대적인 행정구역 개편으로 지명이 변경되었다. 앞서 두 차례의 지명변경은 부분적이었지만 일제강점기 지명변경은 전면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차이가 있다.
네 번째는 2014년 도로명 주소가 전면 시행되면서 마을이름이 사라지게 되었다. 도로명 주소의 전면 시행은 일제의 지명변경 100년 뒤라는 의의가 있을 수 있고 이용하기에 편리해졌다는 이점이 있으나, 한편으로는 정착되는데 앞으로도 상당한 시간이 걸릴 것이라는 점과 마을과 아무런 관련이 없는 도로명이 많다는 점, 특히 마을의 역사가 사라졌다는 점에서는 아쉬운 측면이 있다.
도로명 주소 사용으로 마을이름이 사라졌지만 이는 문서상 이야기일 뿐 실제는 마을이름을 여전히 쓰고 있다는 점에서 마을 유래를 기록으로 남기는 작업을 서둘러야 한다.
특히 일제강점기 지명변경은 민족문화 말살정책이라는 측면에서 조직적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에 일제잔재 지명을 조사하고, 왜색지명으로 규명된 경우는 늦더라도 원래의 이름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행정에서 우리지역에는 왜색지명이 없을 뿐만 아니라 지명을 연구하는 학자도 없다고 단정하면서 일하지 않는 것은 일종의 직무유기이다.
굳이 사례를 든다면 무명동학농민군위령탑이 세워진 고부면 신중리 주산 마을을 ‘대뫼’ 마을로 이름을 바꾸고, 500년 전통의 향약마을 칠보면 시산리 삼리 마을을 원래 이름인 ‘남전’으로 바꾼 것은 시민이 다 아는 일이다.
청산해야 할 왜색지명의 사례
정읍시 옹동면의 대칠(大七) 마을은 속칭 ‘오빠꿀’이라 부른다. 원래 칠을 하거나 접착제로 쓰이는 ‘옻’이 많이 나는 곳이라 하여 붙여진 지명으로 ‘옻밭골’이 ‘오빠꿀’로 전음된 것이다.
따라서 옻밭은 ‘옻 칠’자의 칠전(漆田)으로 한자 표기해야 하며, 마을 이름도 그렇게 불러야 함에도 일제 때 큰 동네, 작은 동네, 바깥 동네라는 뜻으로 대칠, 소칠, 외칠로 바꾼 것이다.
지명 자료인 『호구총수』와 『구한국지방행정구역명칭일람』에는 태인 동촌면에 칠전리(漆田里)로 표기되어 있으나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노탄리(蘆灘里)와 함께 산성리(山城里)에 포함시켰다.
정읍시 칠보면의 삼리(三里) 마을은 원래 남전(藍田) 마을이었다. 중국 송나라 때 남전골에 사는 여대방(呂大防)이 미풍양속을 권장하는 남전여씨 향약을 만들어 시행하자 조선시대 정극인(丁克仁)이 이 곳 고현(지금 칠보)에 살면서 중국의 향약을 모방해 고현향약을 만들었다.
그래서 이때부터 향약 발생지인 중국마을 이름을 따 남전이라 했던 것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삼리로 고친 것이다.
마을 입구에 임실댁 딸네미들이 삼리가 아닌 남전마을로 새긴 표지석이 세워져 있다. <저작권자 ⓒ 전북금강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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