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영 정읍역사문화연구소 이사장
정읍은 민족종교의 효시인 동학(東學)의 뒤를 이은 증산교(甑山敎)와 일제강점기 자칭 ‘600만 교도’를 자랑하며 일세를 풍미했던 보천교(普天敎)의 발상지이다.
또한 오늘날 부산의 태극도와 서울 대순진리회의 뿌리인 무극대도(无極大道)의 본고장이다.
뿐만 아니라 현재는 교세가 쇠했으나 진동학제화교(濟化敎)와 미륵불교(彌勒佛敎) 등이 교단을 여전히 유지하고 있다.
다소 생소하게 느껴지는 청수교(淸水敎)라는 이름의 종교도 있었고, 한때 모악교(母岳敎)의 뿌리가 되는 인정상관의 여처자파가 활동하고 있었다.
입암산성 내에는 갱정유도(更定儒道)가 신앙촌을 이루고 있었고, 입암 북창골에는 ‘하늬재교’가 있었다.
이밖에도 이평면에 영주교(靈主敎), 영원면에 황극교(皇極敎), 칠보면에 보화교(普化敎) 등은 일제강점기에 상당한 교세를 이루고 있었다.
현재 신정동 백학마을에는 증산계열의 대덕전(大德殿)이 자리하고 있다. 이와 같이 정읍은 가히 한국자생종교의 메카라고 불릴 수 있을 만큼 신종교의 활동이 왕성한 곳이었다.
정읍의 종교적인 상징성과 장소성 정읍을 근거지로 다양한 종교가 발생·수용·확산될 수 있었던 것은 정읍이라는 땅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물과 우물, 그리고 샘이 가지는 생명력과 파괴력, 근원과 중심이라는 상징성이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의 신종교에서 물을 각종 의례에서 사용하지 않는 종교가 없을 정도이다.
시인 김지하는 대설 『남(南)』에서 “정읍은 우주의 단전이요, 지구의 축이요, 한반도의 배꼽이다.”라고 하였다.
배꼽은 사람이 태어날 때 중앙의 가치를 의미하는 말이다. 지정학적으로 볼 때 정읍은 한반도의 배꼽이 될 수 없음에도 굳이 중앙을 뜻하는 배꼽으로 표현한 것은 조선 후기 ‘남조선 신앙’에 바탕을 두면서도 물이 가지는 이 같은 상징성을 염두에 둔 것이다.
여기에 ‘풍수와 미륵신앙’이 덧붙여지면서 정읍의 종교적인 장소성과 상징성이 더욱 부각된 것이다.
보천교 독립운동의 의의 보천교에서는 이를 바탕으로 1924년 갑자년 갑자월 갑자일 갑자시에 차월곡이 천자로 등극한다는 ‘천자등극설’을 널리 유포시켰다.
이는 수운 최제우가 순교한 지 60년이 지난 시점으로 동학의 ‘진인출현설(眞人出現說)’을 본 딴 것이다.
한편으로는 보천교의 성전 건물을 완공하여 후천개벽사상을 건축물에 반영하였다.
장봉선이 쓴 『정읍군지』(1936)에 의하면 “궁궐 건축을 모방한 40여동의 건물은 걸어서 나오기까지 1시간이 걸린다 했고, 그 웅장함과 정교함이 반도 내에서는 최고였다”고 극찬했다.
보천교는 이곳을 중심으로 증산종교운동과 동학의 교조인 수운의 가르침을 근거로 하는 종교적인 활동을 폈으며, 월곡은 수운과 증산의 종교적인 가르침에 그치지 않고 이를 정치적으로 확대해석하여 정읍을 근간으로 하는 민족운동과 독립운동을 암암리에 전개함으로써 일제강점기 우리 민족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해 주었다.
일제강점기 보천교는 일본의 식민지 상태를 인정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본 국왕을 부정하면서 새로운 나라 이름 ‘시국(時國)’을 선포하였다. 보천교에서는 입암면 대흥리를 새로운 나라의 서울로 칭하면서 후천선경 신정부 건설을 도모하였다.
차월곡은 지금은 ‘선천세상이 다가고 후천세상이 다가오는 교차 지점에 있다.’는 뜻에서 ‘때 시(時)’ 자를 쓴 것이다. 여기서 ‘시’는 선·후천 교역의 시기를 말한다.
보천교가 해체된 1936년 이후에도 보천교계 신종교들은 정읍을 중심으로 후천선경 신국가 건설운동을 해방이 될 때까지 전개하였다. 그러다가 일제에 잡혀 숱한 고문을 당했다.
고문으로 죽은 자가 부지기수였다.
1940년 전후 한반도에서 드러내놓고 그 어떤 민족운동을 전개할 수 없었던 엄혹한 시절이었다.
전남대학교 교수인 안후상의 박사학위 논문에 따르면, 2021년 4월 26일 현재, 국가기록원의 독립운동판결문의 수형인 명부와 형사사건부, 국가보훈처의 공훈전자사료관의 독립유공자 공적조서, 각종 사료에 나타난 보천교인과 보천교 관련 교단 관련자 총 424명이 일제로부터 혹독한 심문을 받고, 이 가운데 155명이 현재 독립유공자로 지정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일제의 판결문에는 하나같이 이들이 종교를 빙자하여 교도를 모으고, 조선독립을 위해 많은 금액을 모집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로써 볼 때 보천교는 일제강점기 한국민족종교를 대표하는 종교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와 같이 정읍은 다양한 종교가 발생·수용·확산된 지역으로 종교적 상징성이 강한 지역일 뿐만 아니라 독립운동의 중심지였다.
해방 후 백범이 태인 김부곤의 집에 머물면서 “내가 정읍에 많은 빚을 졌다”는 말을 한 것은 정읍이 일제강점기 독립운동 자금지원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읍이 갖는 상징성에 걸맞게 타종교를 이해하는 ‘에큐메니칼(Ecumenical’ 운동이 정읍에서 시작되어야 하며, 이를 바탕으로 정읍에 ‘종교박물관’이라는 특성화박물관을 세우고, ‘종교순례길’을 조성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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