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와(敬窩) 선생이 바라보는 心統性情
본보에서는 열여덜 번째로 경와(敬窩) 엄명섭(嚴命涉) 선생이 바라본 심통성정(心統性情)에 대해 이야기 해보고자 한다.
지난 호에서는 경와 선생의 도(道)의 세계관에 대해 이야기 했었다.
이번호에서는 1946년 경와 선생이 심윤식과의 편지글에 나오는 내용을 다룬다. 내용은 심통성정(心統性情)이다.
심통성정은 중국 송나라 때 대유학자였던 장재(張載)의 내용이다. 장재(1020~1077)는 宋代의 새로운 유학을 세우는데 크게 기여했다.
장재는 天과 人, 天命과 人性을 논리적으로 일관(一貫)시켜주는 이론을 새롭게 궁구하는 사상사적 전환기를 마련해 줌으로써 송대 신유학의 우주론(宇宙論)과 인성론(人性論)의 이론적 출발점을 제공했다.
장재 철학의 궁극적인 목적은 우주 만물의 본질을 파악함으로써 인간이 자기의 본성을 올바로 발현시켜 나아가는 방향을 밝혀 삶의 총체적 모습을 설명하고 이를 실천함에 있었다.
즉 장재철학(張載哲學)에 있어서 人性에 대한 자각은 바로 내재적인 도덕성에 대한 자각이다. 또 그의 철학은 이러한 자각을 통해 지고(至高)하고 초월적인 도덕 본질에 도달한 것이다.
인성(人性)이란 인간의 도덕적 존재 근거이다. 또 인성의 실현은 도덕적 가치의 발현이다. 장재철학은 인간과 인간사회의 모든 관계를 중점에 둔 것이다.
따라서 경와선생이 장재의 심통성정을 어떻게 설명하는지 확인해 본다.
경와 선생은 심윤식과의 편지글에서 心을 이야기한다.
경와 선생은 “성(性)은 곧 리(理)이니(性卽理也) 마음속에 태극(太極)이 되어 지극히 높고 지극히 귀하여(爲心中太極, 而至尊至貴), [태극은 천리의 이름이니 하늘에 있으면 리가 되고 사람에게 있으면 성이 되니 그 실체는 하나이다. 《서경(書經)》에 소위 백성에게 진심을 내려주었다고 하니, 진심은 우리 마음속에 태극이 된다. 이것을 천명의 성이라고 하니, 이를 근원 하여 스스로 지극히 높고 지극히 귀함이 된다(太極, 是天理之名, 在天爲理, 在人爲性, 其實一也. 如《書》所謂降衷之, 衷爲吾心中太極. 此之謂天命之性, 而原是自, 爲至尊至貴也).]”라고 말한다.
경와 선생은 여기에서 태극을 이야기한다. 태극을 천리와 같이 보고 있다. 즉 태극(太極)과 천리(天理), 성(性)을 하나로 보고 있는 것이다.
장재는 心에 대하여 “허(虛)와 기(氣)를 합하여 性의 이름이 있고, 성과 지각을 합하여 心의 이름이 있다”고 말했다. 이 때의 性이란 태허(太虛)로서의 氣인 심의 본체이다. 虛와 氣를 합하여 性의 이름이 있다는 것은 인간본성의 선험적(先驗的)인 것을 가지고 있다.
太虛는 氣를 떠난 것이 아니다. 태허란 기가 흩어져 모이지 아니한 無形의 본체적 원시상태로서 최초의 氣이고 가장 순수한 氣로서 陰陽으로 分化되기 이전의 形而上의 氣인 것이다. 이것이 장재가 말하는 ‘太虛卽氣’라고 하는 것이다.
태허란 것은 하늘의 실체이다. 만물은 태허에서 족함을 얻어 생겨나고 사람 역시 태허에서 나왔으니 태허는 심의 실체인 것이다. 그래서 천지(天地)의 道는 지극히 허한 것을 실체로 삼지 않은 것이 없다.
따라서 태허(太虛)와 기화(氣化)와 만물(萬物)이 서로 순환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太虛는 기가 없을 수 없으며, 기는 모여서 만물이 되지 않을 수 없고, 만물은 흩어져 태허가 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경와 선생은 “일만 선을 갖추어 하나의 흠결도 없다(具萬善而無一欠缺也). [일만 선이 충분하게 갖추어졌다.그러므로 감응에 따라 반응함이 무궁하고 혼연하여 천지와 같은 대체이다.(萬善具足. 故隨感而應, 無窮渾然, 與天地同體)]”라고 말한다. 또 “비록 그러나 형체가 없고 작위가 없다. 그러므로 반드시 마음이 스스로 빔을 기다려 받들고 존경한 그런 뒤에 비로소 실체가 있고 정이 나타남을 안다(雖然無形無爲. 故必待心之自虛而奉之尊之, 然後始認實有而情見焉). [받들고 존경한다는 것은 마음 기운이 하는 것이다. 이것이 마음의 형체가 있고 작위가 있는 이유이다(奉之尊之, 是心氣之所爲也. 此心之所以爲有形有爲也).]”라고 말한다.
위에서 장재의 말을 들어 설명했듯이 태허와 만물이 서로 소통하고 기가 모이면 밝음이 퍼져서 형체가 있게 되고 기가 모이지 않으면 밝음이 퍼질 수 없어 형체가 없게 되는 이치와 같다.
경와 선생은 또 “이 이치는 《주역》에서 소위 내가 동몽(童蒙)에게 구하는 것이 아니라 동몽이 나에게 구한다는 것과 같다(此理, 猶《易》所謂非我求童蒙, 童蒙求我者也). [나는 스승이니 성에 비유된다. 동몽은 제자이니 심에 비유된다(我, 師也, 喩性. 蒙, 弟子也, 喩心).]”라고 말했다.
장재는 《正蒙》,과 《太和》를 통해 우주론의 핵심인 태허, 기화, 만물의 상생 관계를 설명했다.
경와 선생도 내가 동몽(童蒙)에게 구하는 것이 아니라 동몽이 나에게 구한다는 것과 같다를 이야기 한다. 《주역》 〈몽괘(蒙卦 )〉의 괘사(卦辭)에 “몽은 형통하니, 내가 동몽에게 구하는 것이 아니라 동몽이 나에게 구함이다(蒙亨, 匪我求童蒙, 童蒙求我)”라고 한 데에 보인다.
‘동몽’은 ‘어려서 몽매한 것(幼穉而蒙昧)’으로, 육오효(六五爻)를 가리키고 ‘나(我)’는 구이효(九二爻)를 가리키는바, 이는 곧 몽매한 사람이 현명한 스승을 찾아가 배우는 것이지, 현명한 사람이 몽매한 사람을 찾아가 가르치는 것은 아님을 말한 것이다.
경와 선생은 심통성정(心統性情)에 대해 “마음이 절로 비어져 본성을 받들고 존경하니, 이것을 마음이 간섭한다(心統)고 말한다. 간섭한다는 것은 바로 아래로써 간섭하고 계승함을 말하는 것이지 위로써 간섭하고 거느린다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니다. 정(情)은 본성이 발동한 곳이니 그 근본이다. 또 선하지 않음이 없고 편벽되고 의지하고 지나치고 미치지 못한 유가 없을 수 없으니, 진실로 마음이 스스로 본성을 받들고 성찰하여 바로 잡음이 아니니 스스로 법(規矩)에 합당할 수가 없다(心之自虛而奉性尊性, 此之謂心統, 統卽以下統承之謂, 非以上統率之謂也. 情, 是性之發處, 其本也. 亦無不善, 而不能無偏倚, 過不及之流, 苟非心自奉性而察之矯之, 自不能合得規矩). [마음이 성찰하고 바로잡으면 끝내 또한 스스로 마음이다. 스스로 성찰하고 스스로 바로잡으니 본성이 성찰하고 바로잡음이 아니다. 다만 성찰하는 방법과 바로잡은 방법은 본성의 이치로 하여금 그렇게 하는 것이다(心之察矯, 竟亦自心. 自察自矯, 非性察矯也. 但其所以察所以矯, 則是性之理, 使然也).]”라고 말하고 있다.
심통성정(心統性情)은 앞서 말했듯이 虛와 氣를 합하여 性의 이름이 있는 것이고 性과 지각을 합하여 心의 이름이 있다는 것이다.
장재는 心이 性과 情을 통섭하는 것으로 보았다. 즉 인간의 본성인 天地之性과 그것의 작용인 정(情)을 체(體)와 용(用)으로 하는 것이 心이 된다는 것이다.
경와선생이 이야기하고자하는 것은 본성이 중요하다는 것을 강조한다. 그래서 마음을 바르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음을 바르게 하지 않으면 마음의 작용인 정(情)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글=김진성 대기자 dong3680@daum.net <다음 이야기는 9월 30일자에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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