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수필(隨筆) 단상

전북금강일보 | 기사입력 2022/01/27 [17:33]
정성수 시인

[칼럼]수필(隨筆) 단상

정성수 시인

전북금강일보 | 입력 : 2022/01/27 [17:33]

수필 한 편을 써 놓고 보니 ‘이게 수필인지? 칼럼인지? 아리송했다’ 어느 수필가의 말이다. 

‘자신의 경험이나 느낌 따위를 형식에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게 기술한 산문 형식의 글’이 수필이라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핵심은 ‘경험이나 느낌’이다. 여기저기에 발표된 수필을 보면 경험이나 느낌 보다는 나열 중심인 백화점식 글이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예를 들면 ‘동아리에서 문학기행을 갔다. 아침 8시에 집 앞에서 대절 버스를 탔다. 10시에 휴게소에서 커피를 마시고 점심을 횟집에서 회를 실컷 먹고 사찰을 구경했다. 오후 4시에 출발해서 집에 도착하니 식구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재미있는 문학기행이었다’ 

이쯤 되면 수필이 아니라 초등학생들의 일기만도 못함은 자명하다.

수필하면 떠오르는 것이 피천득의 ‘인연’이다. 수필의 전범으로 삼는 작품이다. 내용이야 아는 바와 같이 일본인 여성과 오랜 인연을 통한 고백적 감정을 진솔하게 서술한 수필이다.

주인공 아사코와의 만남에서 느끼는 내밀한 감정과 심리를 담백하게 제시하고, 만남에서 접하는 일상적 사물을 통해 정서와 예술적 이미지를 환기하고 있다. 

간결하고 절제된 문체와 소설과 같은 서사 구조로 서정성을 부각하고 있기 때문에 좋은 수필로 각인된 것이다. 

거기다가 설명으로 흐르기 쉬운 주제를 기품 있고 우아하고 아름답게 썼을 뿐만 아니라 자신이 주장한 수필론을 훌륭하게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웬만큼 나이든 세대라면 누구나 기억하는 산문 수필인 안톤 슈낙Anton Schnack의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 있다. 

안톤 슈낙을 슬프게 하는 대상은 특별하지 않다. 

다만 예리하고 섬세한 시선으로 들여다보는 추억들이 그로 하여금 마음에 울림을 줘 비록 수필이지만 글의 이미지가 시처럼 아름답다. 

조금은 엉뚱하지만 자유로운 상상력이 드러난 작품이다. 

 

이 수필을 수필이 아니라 한편의 ‘장편 서정시’다.

 

요즘 수필이 문학의 한 장르로 대접을 못 받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문학인들의 로망인 신춘문예에서도 제외된다. 

 

중앙지는 고사하고 지방지에서 조차 수필부문은 손가락을 꼽을 정도다. 

 

왜 그럴까? 수필을 자기 자랑이나 신변잡기 식으로 쓰기 때문이다.

 

수필계에서 상당한 지명도가 있는 수필가조차 우리 집 장남이 이번에 국장으로 승진을 했다거니, 딸이 금시계를 사줬다거니, 손자가 반장이 되었다고 쓴 수필을 읽으면서 고소를 금치 못한다. 

 

심지어 우리 집 십대 뉴스를 써 놓고 수필이라고 한다. 

 

뉴스는 공익성이 있어야 한다. 개인의 일상이 뉴스가 될 수 있느냐? 차라리 우리 집 십대 자랑거리라면 몰라도…. 

 

그러면서 수필 등단 오십년이며 수필집을 수 십권 냈노라고 큰소리를 친다.

 

문제는 그런 식으로 수필을 쓰는 것이라고 강의를 한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당연하게 받아드리는 수강생들에게 있다. 요즘 수강생들의 학력은 기본이 대졸이다. 

 

개중에는 석·박사도 있고 교직에 종사한 사람도 있다. 

 

NO를 NO라고 말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우리를 우울하게 한다.

 

‘붓 가는 대로’ 쓴다는 수필의 함정은 막상 글을 써 보면 쉬운 것 같으면서도 쉽지 않다는 데에 있다. 

 

치밀한 구성과 거기에 따르는 많은 제약을 어떻게 헤쳐 나가느냐에 달렸다. 

 

아무나 쓰는 글이 수필이지만 써 놓은 글이 모두 수필은 아니다. 수필은 가르치는 글이 아니라 배우는 글이다.

/정성수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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