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수필] 동생이 있어 행복한 누나

김 금 례 수필가

온라인편집팀 | 기사입력 2020/01/14 [20:21]

[수요수필] 동생이 있어 행복한 누나

김 금 례 수필가

온라인편집팀 | 입력 : 2020/01/14 [20:21]

 친정아버지 기일을 맞아 서울행 기차에 올랐다.


나이 80세가 되었어도 친정 부모님의 제사에 동참하는 남편이 고맙다.


세상 물정을 모르고 부모님에게 고통만 주었던 지난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지며 마음이 아리다. 6‧25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 아버지는 항아리를 땅에 묻고 돈을 넣었다. 하지만 나는 그 행복이 행복인 줄 몰랐다.


대학을 서울로만 가겠다고 고집을 부릴 때 어머니는 철없는 나를 끌어안고 울면서 “너를 서울로 보내고 살 수 없으니, 지방대학에 가거라.”고 권했지만 나는 대학 진학을 포기했다.


대학을 포기하는 딸이 가여웠던지 서울 청운동에 사는 육촌 오빠 집에 가자고 했다. 오빠는 남매를 두고 엑스레이 제작을 하며 다복하게 살고 있었다.


열차 밖에 희미하게 펼쳐지는 풍경이 내 영혼을 깨워 주었다.


“어머니, 그때 서울 나들이를 할 때는 어머니의 무릎을 베고 밤을 지새웠지만 지금은 2시간 7분(KTX)만에 도착했습니다.”


좋은 세상을 살지 못하고 떠나신 부모님 생각을 하니 마음이 아팠다.


용산역에 도착하니 동생 가족들이 해바라기처럼 웃으며 반겨주었다. 작년 11월에 결혼한 큰조카며느리가 내 손을 꼭 잡았다. 동생댁은 시누이 남편의 손을 잡고 에스컬레이터에 올랐다.


집에 들어가니, 시어머니(동생댁)와 며느리의 도마 두드리는 소리가 정겨웠다.


역시 여자는 나이가 들어도 친정에 오면 즐겁다. 장성한 조카들을 보니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부르다.


제사를 지내고 음복을 하면서 남편은 지난날을 회고했다.


“내가 누나와 결혼할 때 처남은 초등학교 5학년, 부유하게 키웠던 외동딸을 고생할 줄 알면서 공무원이고 가난한 9남매의 맏이인 나에게 주기란 쉽지 않았을 거야. 어려운 살림에 분가시키지 못하는 처지를 알고 어머니는 전셋집과 살림을 장만하며 마치 큰아들 분가시키듯 피로한 기색 없이 일하시던 모습이 떠오르네.”라고 회상했다.


부모님 덕으로 남매의 가족이 오늘까지 건강히 잘 살고 있다고 했다. 생각하니 우리는 남매지만 자란 환경이 달랐다. 친정은 내 결혼 3년 뒤 나도 모르게 모든 가산을 청산하고 전주에서 제일 좋다는 문화주택으로 이사를 했다. 문화주택을 찾아가니 기가 막히고 머리에 현기증이 났다.


눈을 부릅뜨고 보았으나 분명 전세 구멍가게였다. 아버지가 택한 일이라 어찌할 수 없었다.


그렇지만 그 많던 재산은 어디로 갔단 말인가? “아버지, 저를 부잣집으로 시집보내지! 저는 어찌하라고…….” 하염없이 흘러내리는 눈물을 주체할 수 없었다.


출가외인이라지만 한마디 상의 없이 처리하신 아버지를 원망했다.


하지만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내 자신이 더 미웠다. 아버지는 “가난은 죄가 아니다. 너만 잘살기 바란다.”고 하셨다.


어머니와 죽마고우(竹馬故友)였으며 새색시 시절부터 같이 지냈던 아주머니가 찾아오셨다.


나의 결혼 준비를 할 때 오셔서 이불 홑청 깃에 손수 재봉질을 하여 예쁜 레이스를 달아주셨던 분이다.


아주머니가 결혼식 날 입을 홍치마 색깔이 어둡다고 하자, 어머니는 즉시 아주머니와 시장에 가서 치맛감을 사오셨다.
그래서 홍치마가 두 개가 되었다. 다 해주고 싶은 어머니 마음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어머니는 사업가의 아내, 아주머니는 남원 군수의 아내지만 시간 내서 정답게 지내시는 모습이 참 보기 좋았다.


나를 친딸처럼 생각하셨다.


그런데 뜻밖에 그 아주머니가 오셔서 “너의 어머니 불쌍해서 어떡하니?”하고 방바닥을 두드리며 우셨다.


그리고는 “너의 동생이 태어나서 어머니가 고생한다.”고 했다.


나는 깜짝 놀랐다. 엄마는 아들이 없을 때 아주머니와 보살들을 찾아가 아들을 원했지만 한결같이 ‘딸이 효녀니 딸 믿고 전주 부자 소리 듣고 살라.’고 했단다.


어머니는 “재산이 없어도 아들이 소원이다.”라고 하니 “만약 손자 같은 아들이 태어나면 당신은 늙어서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한다.” 오늘따라 아주머니 목소리가 더 크게 들린다.


구멍가게 주인의 아들인 동생은 16:1의 경쟁을 뚫고 전주고등학교에 들어갔다. 막혔던 가슴이 확 뚫렸다.


부모님은 공부 잘하는 동생을 보며 몸이 고된 줄도 모르고 일을 하면서 항상 웃으셨다.


비록 구멍가게를 하지만 동생을 가르친다는 희망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생은 고려대학 입시에 떨어졌다.


동생은 후기대학에 들어간다고 했지만 사나이로 세상에 태어났으니 칼을 뽑았으면 한 번 더 도전해 보라는 어머니 뜻에 따라 재수(서울 종로학원에 입학)를 했다.


또 고려대학은 떨어지고 후기 외국어대학에 들어갔다.


스페인어과에서 공부를 잘했다. 졸업하자마자 광업진흥공사에 취직이 되고 26세에 결혼하며 안양으로 이사를 했다.


아들 따라가는 부모님이 이제 모든 고생 떨쳐 버리고 자식과 행복하게 지내기를 바랐다.


어머니와 나는 진한 포옹을 했다. 노년을 편안히 살 것이라고 믿었던 아버지는 손자 보는 기쁨도 잠시 교통사고로 돌아가셨다.


약간의 치매와 관절염으로 고생하시던 어머니마저 호강 한 번 하지 못하고 돌아가시니 가슴이 미어지듯 아팠다.


이제 어리게만 보았던 동생도 며느리를 보았다. 세월이 많이 흐른 것이다.


어머니 제사를 아버지와 함께 지내자고 누차 말했지만 싫다 하더니 결국 올해부터 누나인 나의 말을 따랐다.


“누나, 나도 이제 늙었나 봐. 며느리를 얻으니 마음이 약해지네요. 1년에 한 번 드리는 밥이 힘들다고 아버지와 어머니 제사를 함께 지낸다니 마음이 아픕니다. 부모님에게 불효를 하는 것 같습니다.”


“동생, 그렇게 생각하지 마. 세상 돌아가는 순리대로 살아가자. 어머니도 이해하실 거야. 밥 한 그릇보다 남매의 자손들이 서로 아끼고 사랑하면서 살아가는 모습이 어머니에게 보답하는 거야.

 

모든 가족이 하느님을 믿고 동현이도 개포동성당에서 하느님의 뜻에 따라 결혼했으니 이제 어머니도 천상에서 잘 지내라고 기도드리자.”


동생은 지금도 어머니가 콩나물 팔던 생각을 하면 왜 재수까지 하면서 공부를 열심히 하지 않았는지 후회된다며 눈물을 글썽거렸다.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 이제야 인생의 맛을 아는 것 같다. 나는 어머니로부터 세상사는 법을 배웠다.


부모님이 나에게 천만금을 넘겨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아주머니 말대로 보살님들이 아들 없이 노후를 평안히 지내라고 했지만 어머니는 기어코 손자 같은 자식을 낳아 주었으니 나는 동생이 있어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누나가 되었다.


“어머니 아버지의 제사를 마친 뒤 동생댁과 서울대 대학원을 졸업하고 수출입은행에 다니는 큰조카한테서 용돈을 받았습니다. 경희대학을 졸업하고 범한판토스에 다니는 동훈이가 봉투를 내밀어 너한테는 장가가면 받겠다고 사양하니 나도 돈을 번다고 자랑하며 가방 속에 넣어주었습니다. 어머니 동생을 낳아주셔서 감사합니다.”


황혼에 물든 50대와 70대가 된 남매는 새벽 3시가 되는 줄 도 모르고 부모님을 회상했다. 밤은 자꾸만 깊어 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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